서브탑메뉴
Untitled Document
 
 

 제     목 : 통권6
 글 쓴 이 : 관리자  등 록 일 : 2016-04-04 오후 10:36:39 조 회 수 : 1441
조상의 혼령(魂靈)이 깃든 신주(神主)
석대권(대전보건대박물관학 교수)
사람은 죽어서도 영(靈)은 육체를 떠나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 믿는 것이 한국인의 심상이다. 또한 죽은 조상의 영은 자손들의 길흉화복을 예언해 준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조령과 후손의 관계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성리학의 영향으로 이러한 관념은 더욱더 중요한 것으로 받아 들여졌고 이 점은 죽은 조상을 위해서 후손들이 제의를 지내거나 죽은 조상을 모시는 행동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글의 주제는 신주(神主)에는 죽은 조상의 영혼이 깃들여 있다고 믿는 우리 조상들의 사고가 깃들여 있다.

처음에 신주는 중국의 왕권 확립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의 신주가 보편화된 것으로 보이며, 주로 밤나무를 사용해서 만들어 한 가문의 종가집의 사당에서 모셔진다.

이 글은 우리 조상들이 신주를 어떻게 모셨는지를 살펴보고 신주의 각 명칭과 신주를 사용하던 계층, 신주를 모시던 사당과 왕실의 종묘와의 차이, 신주 대시에 지방을 쓰게 된 이유 등을 언급해 놓았다. 또한 신주를 살아있는 부모보다도 우선 시하는 풍속, 예를 들면 불이 났을 때 늙으신 부모를 제쳐놓고 신주를 먼저 껴 앉고 나왔다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사회에서 신주는 얼마만큼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신주를 모시는 집도 거의 없을뿐더러 지방대신에 사진을 걸어놓는 일이 많아 졌다. 필자는 이러한 변화는 시대에 맞는 것으로 과거의 지나친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어버이에게 감사하는 마음만은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우선 시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능화판 무늬에 나타나는 의미의 세계
성태규(영남대박물관 학예연구사)
자신들의 세계를 인체나 그릇, 의상, 동굴과 같은 공간에 표현하는 것은 인류문화의 보편적 특성이다. 이러한 그림이나 문양은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심상들이 상징적으로 투시되어 있는 것으로 그 시대의 생활상 내지, 의미의 세계에 대하여 많은 자료를 제공해 준다.

이 글의 주제인 능화판은 책 겉장에 무늬를 박아내기 위한 목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시대에 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요즘과는 다르게 예전에 책을 만들 때는 손 작업에 의한 선장 봉으로 책을 실로 묶는다. 이때 겉 표지는 튼튼하고 질기고 아름답고 권위가 있게 치장을 하게된다. 이런 작업과정에 여러 가지 문양들이 능화판에 새겨지게 되는 것이다.

능화판에 나타난 문양들을 살펴보면 크게 기하학적인 문양, 문자형태, 식물문양, 곤충,동물의 문양형태 등 다양하다. 이런 문양들은 각기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술학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만(卍)자, 기하학적무늬, 연꽃이나 매화, 박지, 학 등 매우 다양한 형태이다.

이렇게 새겨진 문양들은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심상의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러한 문양 연구를 통해서 문화전쟁의 시대에 우리만의 독특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은 국가의 이미지 개발과 구축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박달나무와 생활용구
안태현(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
박달나무는 그 재질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에 생활용구로서 널리 사용되어 왔다. 또한 예전에 수레바퀴를 만드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나무였다.

박달나무는 자작 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교목으로 주로 해발 600-700 부근 북향의 경사가 심한 곳의 비옥한 사질 양토가 적윤지이다.

이 글은 제한적인 군락을 이루고 있는 박달나무를 통해 그 재질적 특성과 생활용구와의 관계를 구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관련된 문헌 자료를 살펴보고 재질의 과학적 특성과 경상북도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의 사례를 통해 박달나무가 생활용구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담당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또한 박달나무가 식생활과 관련이 있는 떡살판과 다식판에 사용되었던 점과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목판활자에도 쓰였고 그밖에도 박달나무는 천마총에서 발견된 얼레빗 등 여러 곳에 쓰여졌다.

박달나무는 물론 생활용구를 제작하는데 있어 반드시 써야 하는 당위성은 없다. 다만 누대로 이어온 기술의 인치 체계가 녹아 있기에 박달나무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원칙만은 지켰던 것이다.

남테와 돌테 김동섭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제주도는 화산으로 이루어진 섬으로 지반이 다공질의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논농사는 거의 지을 수 없고 주로 밭농사 중심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제주도 사람들은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과 슬기로 제주도만의 독특한 문화를 전승해 오고 있는 것이다.

밭을 주로 일구던 제주도 사람들에게 70년대까지도 그들의 주식은 보리의 일종인 '나맥' 이였지만 동절기와 같은 시기에는 조가 주식 이였다. 그러나 고구마와 감자가 들어와서는 조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조나 보리를 파종하던 시기는 가을 추수가 끝나는 10월경에 하게되고 이렇게 파종한 보리나 조는 화산회토의 토질로 이루어진 토양에서는 바람에 쉽게 날려갈 뿐만 아니라 비에 쉽게 쓸려 간다. 이 때문에 파종한 조는 제대로 발아되지 않을 경우가 있고 또한 태풍이나 장마로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따라서 제주도에서는 파종때 밭밟기를 해 왔는데 이때 사용하던 도구가 바로 남테와 돌테이다.남테는 나무로 만들었고 돌태는 돌로 만든것으로 '테' 라는 것은 떼(무리)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남테와 돌테의 형테, 규격, 사용방법, 제작과 수명, 보관방법, 테로 밭을 밟을 때 하는 소리등을 소개해 놓았다.

남테와 돌테는 제주도 사람들의 삶의 지혜가 담겨져 있는 것으로, 그들이 어떻게 자연을 이용하면서 살았는지 알게 해주는 단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다른 민속품들과의 비교, 연구 된다면 제주도 만의 독특한 문화를 밝히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통구민배의 생김새와 어로관행 곽유석
(국립해양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통구민배는 경상남도 남해안 지역에서 사용되어 온 우리의 전통선박이다. 현재까지도 통영 일부에서는 통구민배의 형태가 남아 있다.

통구민배의 명칭은 오래전 통나무속을 파내어 만들었기 때문에 '통선'이라 불렀고 다른 이름으로는 '통구맹이', '통구미' 등으로 불려졌다. 지금은 완전한 형태의 예전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통구민배를 옆에서 보면 가야시대에 만들어진 주형토기 모양의 흔적이 남아 있어 삼한시대 통나무배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통구민배의 생김새, 특히 통구민배에서 볼 수 있는 특징과 통구민배의 어로 관행을 살펴봄으로서 우리 문화의 한 축인 해양문화, 특히 사라져 가는 전통 한선을 통해서 옛 선조들의 어로관행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통구민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이물과 각 부분의 명칭, 고물의 단면도 등을 1960년대 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통구민배의 변화된 모습을 사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솥과 민속(1)
신영순(국립중앙과학과 학예연구사)
솥은 주방용구로 기능에 따라 국솥과 찬솥으로 구분되며 부엌에 제일 큰 솥을 조왕솥이라 한다.

솥은 고대사회의 지배층에는 왕권 및 힘의 상징, 관리를 처벌하는 형구(形具), 종교적 의미, 죽은자의 식량을 담아 놓는 용기 등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솥의 여부는 전쟁의 승패와 직결됨으로서 한 나라의 군사력을 상징하고 사찰에서는 불사리를 넣어두는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반면에 일반인들에게 가족의 안녕과 가정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불씨와 동일시되었으며 '솥 단지를 뗀다' 할 때는 이사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글은 솥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솥과 관련된 민속, 즉 솥 신앙, 솥씀과 솥뚜껑 꼭지밟기, 솥을 이용한 농사의 풍흉(豊凶) 점치기, 솥 찜질, 며느리심 등을 살펴보았다.

솥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이글을 통해 민속학적으로나 생활사에 있어서 중요한 솥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 조상들의 생활방식이나 그들의 의식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었으면 한다.

     
옹기그릇
이영진(경북과학대학 문화재관리학과 교수)
지금도 농가에서나 도시의 가정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옹기는 전통생활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쓰임새나 명칭이 매우 다양하다.

옹기는 숨을 쉬는 그릇이라고 부르며 우리 나라의 옹기는 크게 오지그릇과 질그릇으로 나뉜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옹기는 오지그릇에 광명단을 유약으로 입혀 만든, 이른바 광명단 옹기이다.

이 글은 옹기의 유래와 발전, 각 지방의 옹기의 형태와 옹기에 새겨진 무늬, 가마터에서의 옹기를 만드는 과정, 옹기의 쓰임새 등을 소개해 놓았다. 한국은 '항아리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옹기를 비롯한 도자기 생산이 많았고 옹기 안에는 한민족의 얼이 담겨져 오늘날까지 그 순수성과 투박함을 간직한 채 끊임없이 성장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옹기의 명성이나 제작기술이 점점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현대 과학문명이 우리에게 편리함을 제공해 준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러나 옹기와 같은 전통문화에 담겨져 있는 우리 정신만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고 다소 불편하더라도 전통의 맥을 스스로 단절시키는 일은 가급적 삼가 해야 한다.

     
유지삿갓 만들기
박장영(안동민속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요즘처럼 우산이나 양산이 없던 시절 삿갓은 태양 볕을 가려 주는 동시에 비를 막아 주는 도구로 쓰였다.

이 글은 안동시 옥동에서 수 십년동안 유지삿갓을 만들어 온 김동욱옹(翁)을 만나 유지삿갓의 제작과정과 그분이 살아온 모습이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실어 놓았다. 김동욱옹은 현재 옥동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유지삿갓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오래 전부터 옥동 주민들은 온 식구 모두가 가을 추수가 끝나면 겨울 내내 유지삿갓을 만들어 봄이 무르익을 때 유지삿갓을 완성시켜 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필자가 만난 김동욱옹도 한 동안 삿갓을 만들 오던 사람이다.

옥동 사람들은 삿갓을 만드는데 있어 필요한 재료들은 주로 인근 지역에서 구하고 맨 마지막 삿갓에 바르는 들기름은 직접 짜서 합지에 바른다. 제작 시 쓰이는 도구로는 활비비와 통곳(통송곳), 칼, 낫 등이고 이런 도구들은 주로 대나무를 쪼개거나 다듬는데 사용된다.

예전에 옥동에서 만든 유지삿갓은 3개정도만 만들어 팔아도 보리쌀 한 말을 살수 있을 정도로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그래서 옥동 사람들은 다른 마을과는 달리 겨울철의 배고픔을 유지삿갓을 통해 해결 할 수 있어 유지삿갓이 대대로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유지삿갓도 비닐이 생산되고 우산이 등장하면서 서서히 우리 곁에서 사라져가 아쉬움을 더한다.

     

/new/data_book.asp?mode=view&aseq=2090

이전글 통권5
다음글 통권7
 글목록  글삭제  글수정  새글쓰기  
의견달기    
덧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