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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통권5
 글 쓴 이 : 관리자  등 록 일 : 2016-04-04 오후 10:37:05 조 회 수 : 719
우리 나라의 능묘조각(석인상, 십이지상, 장명등)
최응천(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예로부터 왕이나 권진사대부의 능묘에는 부조상으로 장식된 호석을 돌리거나 난간을 만들고 그 앞에는 돌로 만든 인물상이나 동물상을 배치한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중국에서는 이미 전한(前漢)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우리의 경우는 백제의 무녕왕릉 안에서 발견된 석수가 있기는 하나 왕실의 문,무인석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 성덕왕릉(B.C. 736년경)에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

문,무인석을 세우는 목적은 왕실이나 가문의 권위를 상징함과 동시에 죽어서도 평시처럼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기를 원했던 수호의 목적이다.

이 글은 능묘조각 중 석인상, 십이지상, 장명등을 중심으로 우리 나라의 능묘조각의 특징과 흐름을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도 조선시대는 과거의 형식이 꾸준히 지속되었을 뿐 아니라 왕실 가족묘에는 거의 빠짐없이 제작된 점을 언급하면서, 조선시대를 시기별로 다시 5기로 나누어 각 시기별 특징을 적어 놓았다.

한국 능묘조각은 중국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점차 한국적 개성이 가미되어 우리만의 독특한 능묘제도와 조각으로 정착되어 나갔음을 무복(武服)을 입은 십이지상 등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능묘조각은 조영 당시의 문화나 사회적 모습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문화 유산이다.

     
혼인과 기러기
정종수(문화재관리국 학예연구관)
이 글은 혼례에 기러기를 쓰는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혼례에 대한 몇 가지 의문점, 혼례는 왜 신부집에서 치루었는지? 와 왜 옛날에는 혼례를 저녁에 올렸는지를 타당한 이유와 근거를 들어 설명해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1920년대의 구례지역에서 살던 유씨 집안의 결혼비용에 관한 문서를 통해 오늘날의 금액으로 환산하여 현재의 실태와 비교해 놓았다.

그리고 재미있는 내용들이 있는데 몇 가지 소개하면, 첫째 혼례에 기러기를 쓰는 이유는 기러기는 어느 새보다도 암,수 사이가 좋을뿐더러 날아다닐 때는 선두를 중심으로 가지런히 지키는 습성을 본받아 인간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이유에서 기러기가 혼례식에 등장한다.

둘째 혼인을 신부집에서 하는 이유는 여자를 위한 배려도 있겠지만 경제적 이유와 음양의 조화 떄문이다. 그리고 옛날에 혼례를 저녁에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속설이 있지만 필자는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시기에 신랑이 신부집에 가기 위해서는 아무리 일찍 신부집으로 출발하여 혼례식을 준비해도 거의 저녁이 다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외에도 몇가지 재미있는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허례 허식적인 우리의 혼례 풍속이다. 이런 문제는 조선시대의 유가적인 영향아래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여러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아들을 가진 쪽의 변화하고자 하는 자세이다.

     
연평도 조기잡이와 어살(漁煎)
주강현(민속학, 해양문화재단 이사)
연평도는 한때 칠산어장가 더불어 우리 나라 최대의 조기어장이 형성된 곳이다. 불과 30-4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수 천 척의 배가 몰려와 조기를 잡아 바다 가운데에서 직접 주고 파는 파시(波市)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이 글은 연평도에 엄청난 양의 조기가 몰려온 이유가 그 당시의 어업생산력과 거리적인 조건, 조기 어획방법 등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소개해 놓았다. 특히 대표적인 조기 어획방법인 어살과 조기의 신으로 불리는 임경업 장군의 신화에서 나오는 조기를 잡았다는 신화의 현장이 바로 연평도가 아닐까 하는 확신을 가지고 글을 기술하고 있다.

오늘날처럼 제대로 된 그물이나 어획도구가 없었던 시절에는 엄청나게 몰려드는 조기 뗴를 한꺼번에 많은 양을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어획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 사용했던 어살이나 독살은 충분한 역할을 해냈던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연평도 어살은 임경업 장군신화를 잉태한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어살의 연구는 생산도구의 문화사적 연구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도구인 것이다.

인간은 '살아있는 노동'을 떠난 노동도구의 연구를 지양에서 민중생활사 속에 살아 숨쉬는 노동도구를 연구함으로써 민중들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글이다.

     
지붕재료에 의한 전통주거형태
정명섭(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우리의 전통주택을 한옥(韓屋)이라 부르는데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마루와 온돌이 같이 있다는 점에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주거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이 글은 지붕의 재료에 따른 분류를 중심으로 각 지방에서 쓰이는 지붕의 재료들의 차이를 통해 우리의 옛 조상들은 과연 주어진 자연환경을 어떤 식으로 이용하면서 살았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짓을 짓기 시작한지는 약 5000년이 흘렀는데 처음 농사짓기 전에는 지붕의 형태는 주로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풀(草)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지붕 재료들은 기와집이나 짚으로 만든 초가집, 강원도 산간의 너와나 굴피, 제주도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억새 등인데. 이런 재료 중에 기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 지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천연재료였기 떄문에 그 지역과의 자연조건과 자장 조화될 수 있는 주택의 형태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붕 하나에도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그것에 순응하면서 적응하면서 살던 우리 조상들의 자연관이 그대로 담겨져 있어, 지붕은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로 하여금 조상들의 모습을 느끼게 해주는 문화의 얼이 숨겨져 있다.

     
연자방아考
김재호(온양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연자방아의 출현은 초기 맷돌에서 시작되어 차츰 커져서 17세기에 윗돌이 1m이상 되는 것 까지 나왔다. 중국문헌과 연암 박지원의 연암집으로 미루어 18세기가 되어서야 농촌까지 연자방아가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연자방아의 형태로는 지역별로 명칭의 차이가 있으나 기능은 같고 대체로 대동소이하다고 볼수있으며 크게 부분명칭으로 테,아랫돌,윗돌,방틀,고줏대,줏대,고줏구명,뺑이,후리채로 나뉜다. 연자방아는 곡식 이삭에서 알갱이를 떨고곡식을 찧고 빻는 일에 사용되며 멱서리나 멍석 따위를 결을 짚을 부드럽게 하는데 사용되기도 하고 광산에서 채광물을 으깨는 데도 이용되었다.

이렇게 곡식을 도정하는 원리는 맷돌의 윗돌 중심에 축을 만들어 이를 아래짝의 중심에 세운 축에 연결시켜 두 축을 서로 수직이게 하여 윗돌을 회전시키는 구조이다.

     
우리의 목침(木枕)문화
소재구(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우리 선조들은 잠을 자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할 때 베개를 사용하여 왔다. 물론 원초적인 베게는 우리가 오늘날에 볼 수 있는 왕겨나 메밀 껍질을 넣어 만든 베개는 아니고 무녕왕릉에 발견된 것처럼 나무로 만든 베개의 형태였을 것이다.

목침의 주재료는 소나무, 감나무, 오동나무, 괴목, 대나무 등이고 이런 것으로 만든 목침은 체온을 은근히 받아들여 어느 정도 온도를 유지하여 주며 금속이나 도자기보다도 부드러운 감촉으로 피부에 닿아 사람들에게 따뜻함과 친근감을 주었다. 또한 동의보감에서는 목침이 인체에 기를 순화시켜주는 도구로서 건강에도 유익한 침구임을 적어 놓았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좋은 목침은 점차 선호도가 높아짐에 따라 목침의 형태나 장식이 다양해져 갔다. 또한 목침에는 신침(神枕)이나 약침(藥枕)이라 하여 목침 안에 약재를 넣어 사용한 약침이나 향침 등이 있고 목침 안에 서책을 넣어 둠으로써 선비들이 문향을 즐기려는 매우 이상적인 아취를 정신적으로 이입시킨 목침도 있다.

이렇듯 목침은 원시적인 침구에서 시작되어 건강을 위한 침구로 발전하고 휴식용 침구로 유행하기까지 우리 곁에서 친근한 목공예품으로 존재해 왔을 뿐만 아니라 재질이나 조형적인 면에서도 예술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죽부인(竹夫人)
인병선(짚풀생활사박물관 관장)
죽부인은 여름에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우리 조상들이 안고 자던 대(竹)로 만든 생활용구이다. 지금도 우리 나라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을뿐더러 그 수요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죽부인이 최초로 만들어진 곳은 중국인 듯하고 중국에서는 죽부인을 죽협슬이라 부른다. 또한 중국에는 [죽부인전]이라는 가전 소설이 몇 편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고려말에 이곡이 쓴 [죽부인전]과 비교하면 중국의 죽부인이 우리 나라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죽부인은 남성의 전용물이었다. 명칭도 그렇고 어른 키 만한 죽부인을 품에 안고 팔다리를 얹게되어 있어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어울리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죽부인은 부인이기도 하지만 남성들이 부담스러워 할만 한 것이 없는 데다 절개를 지키고 아무런 치장 없이 여름에 왔다가 가을이 되면 조용히 물러나는 점이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상과 일치가 되기 때문에 남성들이 여름에 즐겨 찾던 생활용구이다. 따라서 죽부인은 남성 사회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꼭두각시라 할 수 있다.

이런 죽부인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주로 극히 한정된 양반토호였을 것이다.

현재 죽부인의 대부분은 담양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그 수효가 나날이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일반화되었다. 중국에서 발생하여 천년 이상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서 명맥을 이어온 죽부인은 이제 21세기를 맞이하여 그 운명의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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